자회사 상장 중단에도 증설 필요…장기계약으로 투자 부담 낮추나
4일 재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 기업공개(IPO) 검토를 중단한 이후에도 늘어나는 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투자 시기와 규모, 재원 조달 방식을 검토를 이어가고 있다. IPO를 통해 최대 150억달러(약 20조원)를 확보하려던 구상이 중단됐지만, 고객 수요에 맞춘 생산능력 확충은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고객과의 장기공급계약(LTA)이 투자 부담을 낮출 수단으로 거론된다. 고객이 구매 물량을 미리 확정하고 계약 이행을 담보하면 향후 매출을 예측하기 쉬워지고, 이를 바탕으로 증설 규모와 자금 집행 시기도 조정할 수 있어서다. 계약에 고객의 자금 참여까지 더해지면 SK하이닉스가 직접 부담할 투자금도 줄일 수 있다.
실제 SK하이닉스가 확보한 LTA 물량은 2027년과 2028년 전체 메모리 생산능력의 50% 이상에 해당한다. 통상 5년인 계약을 통해 중장기 공급 물량을 확보한 데 이어 2027년부터 2029년까지 3년간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예정 물량도 사실상 완판된 것으로 파악된다. HBM 수요가 공급 가능 물량의 2배를 웃도는 만큼 2030년까지 수요 우위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중복상장에 따른 지분가치 희석 우려로 주주 반발이 이어지고 금융당국도 관련 규제를 강화하면서 결국 지난달 23일 솔리다임 상장 검토 중단을 밝혔다. 다만 솔리다임은 AI 데이터센터용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수요 급증에 대응해야 하는 만큼 상장 중단 이후에도 추가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미국 고객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 개편도 이뤄졌다. SK하이닉스는 미주총괄을 신설하고 HBM과 소캠(SOCAMM) 등 AI 메모리 개발을 이끈 안현 개발총괄 사장을 선임했다. 기존 영업·마케팅에 연구개발(R&D)을 더해 고객의 요구를 제품 개발과 공급계획에 반영하는 현지 대응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취지다.
안 사장은 AI 메모리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고객이 요구하는 제품 사양과 공급 시점에 맞춰 개발 난도와 양산 일정, 공급 가능 물량을 함께 검토할 수 있는 인물로 꼽힌다. 고객과의 협의 단계부터 기술과 생산 여건을 조율하면 장기계약의 구체성을 높이고, 이에 맞춰 필요한 설비 규모와 투자금 회수 기간도 산정할 수 있다. 미국 빅테크와의 소통을 실제 공급계약으로 연결해야 하는 시점에 기술과 사업을 함께 조율할 사장급 조직을 배치한 셈이다.
SK하이닉스 측은 <IB토마토>에 "중장기 수요 가시성을 높이고 성장 기반을 다지기 위해 글로벌 대형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CSP)를 포함한 14개 주요 고객과 LTA를 체결했다"며 "일부 고객과는 통상 5년인 계약 기간을 더 늘리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신설된 미주 총괄 부문은 조직 개편이 진행 중인 상황으로 향후 현지 빅테크 고객 중심의 체계를 구축하고 기술 리더십과 연구개발 역량 강화를 이끌 예정"이라며 "안 사장은 AI 메모리 개발을 이끈 기술력과 리더십은 물론 사업·전략 경험과 글로벌 역량을 두루 갖춘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순현금 98.7조원…늘어나는 투자와 주주환원 병행 과제
SK하이닉스는 실적 성장으로 현금이 쌓이면서 자체 투자 여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청신호다. 3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114조 5000억원, 차입금은 15조 8000억원으로 순현금은 98조 7000억원이다. 전분기 대비 현금성 자산은 26조 5000억원 늘고 차입금은 2조 8000억원 줄었다. 이에 따라 솔리다임 상장 검토 중단 이후 재무 전략도 확보한 현금을 사업별로 얼마나, 언제 투입할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현금 축적을 뒷받침한 것은 AI 메모리 중심의 실적 성장이다. 3분기 매출은 104조 6155억원, 영업이익은 83조 3338억원으로 전분기 대비 각각 32%, 38% 증가했다. D램에서는 서버용 DDR5 판매와 HBM4 출하가 늘었고, 낸드에서는 321단 eSSD 판매 확대가 실적을 끌어올렸다.
이 같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설비투자도 이어진다. 회사는 HBM 생산 거점인 M15X의 생산능력을 연말까지 최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낸드는 4분기 국내 생산능력에서 321단 공정이 차지하는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높일 계획이다. 고성능·고용량 eSSD 공급을 늘리는 동시에 내년에는 용인 1기 팹 가동과 국내외 인프라 투자까지 예정돼 있어 전체 투자액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여기에 주주환원 약속도 이행해야 한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약 100조원 규모의 주주환원을 추진하고 잉여현금흐름(FCF)의 50% 이상을 환원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실적이 늘더라도 설비투자 지출이 함께 확대되면 실제 배분할 수 있는 현금은 달라지는 만큼 투자금 집행과 현금 유입 시기를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 솔리다임의 성장 재원 역시 본체의 증설과 주주환원에 필요한 자금을 함께 고려해 배분해야 한다.
결국 장기계약으로 확보한 수요가 안정적인 현금 유입과 투자금 회수로 이어져야 미국 사업 확대와 주주환원을 병행할 여력도 커진다. 고객과 합의한 가격과 물량을 바탕으로 증설 규모를 정하고 예치금이나 공동투자 등으로 자금 부담을 나눌 수 있다면, 지분 희석 없이 외부 재원을 활용하는 길도 열릴 수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솔리다임 상장 철회로 중복상장 할인 우려는 걷혔지만 외부 자본 조달 창구도 함께 닫혔다"며 "LTA 예치금과 고객 공동투자를 묶어 지분 희석 없이 미국 증설 재원을 마련한다면 주주가치와 성장을 함께 챙기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