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나침반이 사라진 시장, 공포가 방향이 됐다
지표는 쏟아지지만 정책은 침묵
정치 혼란이 만든 구조적 무력감
공개 2025-04-09 06:00:00
이 기사는 2025년 04월 09일 06:00분 IB토마토 유료사이트에 노출된 기사입니다.
트럼프의 입김은 거셌다. 지난 7일 코스피는 5.57% 급락해 2328.20p로 마감했다. 지난해 8월 이후 최대 낙폭이다. 코스닥도 5.25% 하락하며 간신히 650선을 지켜냈다. 일본 닛케이225는 7.83%, 홍콩 항셍지수는 13.22% 급락했다. 아시아 증시 전반이 공포에 휩싸인, 그야말로 '블랙먼데이'였다. 하지만 이번 급락을 단순히 낙폭 문제로 치부하긴 어렵다. 진짜 문제는 시장이 방향을 잃었다는 데 있다.
 
(출처=연합뉴스)
 
가장 큰 원인은 통화정책의 ‘나침반’ 상실이다. 정책당국조차 뚜렷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시장의 신뢰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올해 두 차례 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지만, 내부 메시지는 혼선 그 자체다. 제롬 파월 의장은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 “추가적인 물가 둔화가 확인돼야 금리 인하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일부 위원들은 “올해 인하는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기준금리를 3.00%에서 2.75%로 25bp 인하했지만, 이후에는 “성급한 완화는 경계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금리 인하 사이클에 본격 진입한 것인지, 일시적인 조정에 불과한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이창용 총재는 “불확실성이 크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결국 한국은행도 명확한 정책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은 변수 하나에도 시장이 과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고용과 소비 지표는 여전히 견조하지만, 서비스 물가가 다시 상승 조짐을 보이면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란 간 무력 충돌 가능성,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대만 해협을 둘러싼 긴장 고조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글로벌 투자 심리를 짓누르고 있다.
 
또 다른 불확실성은 AI 기술주를 중심으로 한 밸류에이션 버블 우려다. 골드만삭스는 향후 5년간 빅테크 기업들이 AI 관련 데이터센터·반도체 투자에 1조달러 이상을 투자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이 같은 막대한 투자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최근 엔비디아, AMD 등 고평가된 일부 반도체주의 주가 급락은 밸류에이션 조정 신호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정부의 강경한 정책 기조 역시 당장 바뀔 가능성은 낮다. 이에 따라 중국은 34%의 상호관세를 예고하며 보복 카드를 꺼내들었고, 유럽연합(EU), 캐나다, 멕시코 등도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다. 수입품 수요가 국산 제품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기대도 일부 있지만, 이를 통해 불확실성을 상쇄하긴 역부족이다. 오히려 기업들이 앞다퉈 반응하며 시장의 변동성을 키울 위험이 더 크다.
 
이처럼 금리, 실물 경기, 지정학 리스크, 기술주 수급 등 모든 신호가 뒤섞인 상황에서 시장은 극도로 예민해진다. 정보는 넘치지만, 이를 판단할 기준은 실종됐다. 이런 구조에서는 합리적인 투자 판단보다 공포 심리가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지금 필요한 건 정책당국의 명확한 시그널이다. 단기적인 시장 개입이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시장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방향 제시가 절실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 2020년 팬데믹 초기, 미국과 주요국 중앙은행은 신속하고 일관된 정책으로 신뢰를 회복한 바 있다. 반면 지금은 연준도, 한국은행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중립적 발언만 반복하고 있다.
 
정부가 모든 시장 상황에 개입할 순 없다. 하지만 ‘방향’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통화정책의 나침반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누구도 장기 전략을 세우기 어렵다. 이번 ‘블랙먼데이’의 공포는 단지 낙폭 때문이 아니다. 기준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불안이 시장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클수록, 정책당국의 책임은 더 무겁다.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야말로 지금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침반이다.
 
유창선 금융시장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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