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생명 청산 서비스 전문 소규모 미국 증권사 인수절반에 성공에 그친 동남아 리테일 시장 중심 진출해외 진출 기업 자금 수요, 증권업계 도전과제로 떠올라
[IB토마토 최윤석 기자]
한화생명(088350)이 미국 증권사를 인수하면서 국내 증권업계에 해외 진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당 증권사는 자산 규모 1조원 수준의 소형 증권사지만 기업 청산 업무 자격을 갖춰 기업금융에 특화됐다. 주로 동남아시아 등 저개발 국가를 중심으로 한 리테일 시장으로 진출했던 것과 궤를 달리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 과정에서 필요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화생명, 미국 증권시장 진출 선언
한화생명은 최근 미국 소재 증권사 벨로시티(Velocity Clearing, LLC) 지분 75%를 매입하는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 거래 금액은 2000억원대 중반으로, 한화금융그룹은 이번 인수를 통해 글로벌 종합금융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한화생명)
벨로시티는 미국 뉴저지주에 위치한 기관투자자 중심 서비스를 제공하는 증권사다. 구체적으로는 중개서비스, 주식대차거래, 프라임 브로커리지(PBS)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사명에서 알 수 있듯 '청산(clearing)' 서비스가 주된 업무다. 다른 금융기관이나 증권 브로커를 대신해 매매거래의 채권·채무를 확정해 주는 기능을 말한다.
이번 인수는 회사 자체 역량보다는 벨로시티가 가진 라이선스 취득에 더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0월 기준 벨로시티의 자산 규모는 한화로 1조4000억원 수준으로 미국 자본시장 규모로 볼 때는 작은 규모다. 하지만 주 업무영역인 청산·결제 라이선스의 경우 3000개가 넘는 현지 증권사 중 60여 곳만이 보유한 것으로 진입장벽이 높다.
청산업무가 주요 업무인 증권사 인수는 향후 기업인수(M&A)를 염두에 둔 포석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증권시장에서 청산이란 기업 매각이나 부도 상황에서 회사자산처분 권리를 위임받아 진행하는 업무를 말한다. 즉 벨로시티 인수를 통해 회사의 매각과 인수 딜에 참여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는 셈이다.
미완의 동남아 리테일시장 진출
이번 인수는 기존 동남아 시장에서 리테일 영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증권업계 해외 진출과 달리 기업금융을 염두에 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서 국내 증권업계는 주로 리테일망을 갖춘 저개발국가 현지 법인 인수를 통해 시장에 진출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인도네시아 법인을 통해 주식매매 시스템을 도입과 리테일 영업체계을 구축했다. KB증권도 현지 법인을 사들여 KB금융그룹 산하 은행·손해보험·카드·캐피탈과 연계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동남아 시장의 주식시장이 생각보다 활성화되지 않아 적자거나 흑자를 내더라도 소폭에 그쳤다. 실제로 한국투자증권 인도네시아법인은 지난해 959만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KB증권의 경우 지난해부터는 부채자본시장(DCM)을 중심으로 한 투자금융(IB)부문이 성과를 내면서 올 상반기 31억1300만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최순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증권사의 아시아 신흥국 해외사업 전략은 사업 범위 확대에 있어 중장기적인 시각을 두고 접근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라며 “국내 증권사의 해외사업 전략이 고도화되려면 금융업계와 금융당국의 지원 방안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IB로 해외시장 진출 방향 전환
국내 증권업계의 동남아 시장 진출이 미약한 반면,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에 따른 금융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노믹스 2기 출범을 전후로 미국 현지 기업 인수와 사업 확대를 추진 중이다.
미국 필리 조선소 (사진=한화오션)
필리 조선소는 미국의 대표 군함 조선소로 미국에서 건조된 석유화학제품운반선(PC선), 컨테이너선 등 대형 상선의 약 50%를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 필리 조선소의 영업적자는 7161만달러로 1년 만에 3배 가까이 확대됐다.
한화그룹은 미국 군함 유지·보수·정비(MRO) 시장 진출을 위해 해당 조선소를 인수했다. 당시 인수 금융 주관사가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화가 지불한 인수 금액은 1억달러 한화로 약 1380억원 수준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청산에 가까운 매각이 이뤄졌다는 평가다.
이번 인수 주관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2기에 미국으로의 한국 기업 진출은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그에 수반하는 금융 수요에 대해 국내 금융권은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화생명의 미국 증권사 인수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국내 기업들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 시장으로의 진출을 준비 중이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버플라카의 경우 기존 국내 상장 계획을 철회하고 미국 나스닥을 노리고 있다. 이전 국내시장 대신 나스닥을 선택한 쿠팡의 전례를 따랐다.
쿠팡의 경우 상장 당시 주관사로 골드만삭스, JP모건, 앨런앤컴퍼니를 선정했다. 당시 시가총액은 100조원을 상회하고 상장 첫날 거래액은 900억원에 이르렀지만 국내 증권사는 배정 물량을 유통하는 데 그쳤다.
이에 금융투자업계에선 해외 진출 국내 기업의 자금 조달이 금융투자업계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도 토로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사업의 주변부부터 단계적인 사업 진출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의 자금 조달이 해외 시장으로 확대됐다는 점은 국내 증권사에게도 긍정적"이라면서도 "상장에서 적용되는 해외 법률과 국내 법률이 상이하고 현지 인력으로 진출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기업공개(IPO)와 외화 표시 채권 발행에서 인수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일정 부분 참여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최윤석 기자 cys55@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