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목동·여의도 등 대형 정비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설계사와 건설사업관리(CM)·프로젝트관리(PM) 업체들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수주 확대가 곧바로 재무안정성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계·프로젝트관리 업종은 인건비 비중이 높고 용역대금 회수 기간도 길어 외형 성장과 별개로 현금흐름 부담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비사업 중심 포트폴리오와 반도체·데이터센터·해외 인프라 등 하이테크 사업 중심 포트폴리오는 발주처의 신용도와 사업별 수익성, 대금 회수 구조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에 <IB토마토>는 정비사업 수혜로 주목받는 희림을 비롯해 한미글로벌, 포스코A&C 등 주요 설계·CM·PM 업체의 매출채권 회수기간(DSO)과 영업현금흐름, 발주처 신용도, 사업별 수익성을 비교해 수주 확대가 실제 수익과 현금 창출로 이어지고 있는지 짚어본다.(편집자주)
[IB토마토 김소윤 기자] 설계·CM(건설사업관리)·PM(프로젝트관리)사들에게 정비사업은 양날의 검이다. 화려한 수주실적을 통한 수익성 확대와 사업 중단에 따른 리스크 발생 가능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유로 지체되는 정비사업은 인건·용역비의 매몰비용 전환, 대금 회수 지체 등을 초래한다. 일부 설계사들이 수주 실적이 늘어났음에도 재무 건전성이 우려되는 이유다.
반포 미도 재건축 (사진=희림)
구암1구역, 조합해산으로 사업 중단
1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창원 구암1구역 주택재개발 사업은 정비사업 중단 시 설계사가 어떤 재무 부담에 직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해당 사업은 조합 해산과 정비구역 해제 절차가 진행되면서 약 14억원의 매몰비용 처리 문제가 불거졌다. 정비사업 추진 과정에서 투입된 각종 용역비와 운영비, 설계비 등이 포함됐다. 사업 자체가 무산되면서 비용 부담 주체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해당 사업장 갈등의 핵심은 조합이 자체 자산이 없는 상태에서 사업이 중단될 경우 누가 해당 비용을 부담해야 하느냐는 점이었다. 정비사업 조합은 설계사 등과 계약을 체결해 사업을 추진하는데 사업 무산 시 수행된 용역의 대가가 미수금으로 남을 수 있다.
구암1구역에서도 매몰비용을 조합원 개인에게 부담시킬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법적 다툼이 이어졌다. 대법원은 조합 총회의 별도 의결이나 정관상 근거가 없는 한 조합원 개인에게 비용을 부담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부천 심곡동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설계·PM 업계가 안고 있는 또 다른 위험 요인을 보여준다. 해당 사업에서는 PM사 대표가 건축설계사무소와 공모해 설계용역비를 적정 수준보다 높게 책정한 뒤 일부 금액을 되돌려 받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사업 과정에서 발주처와 설계사, PM사 간 신뢰가 훼손되면서 계약 구조 전반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고 결국 형사 고소로까지 이어졌다. 창원·구암·부천 사업장은 정비사업 지연이 설계사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정비사업은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서울시 정비사업 추진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5년 이전 조합을 설립하거나 사업시행자로 지정된 정비사업장은 총 75곳이다. 지난해에도 착공하지 못한 사업장도 49곳이었다. 조합 설립 10년 이상 사업장의 약 65%가 여전히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설계사 업계는 사업이 장기간 표류할수록 설계 변경과 추가 용역이 반복되고 대금 회수는 지연된다고 토로한다. 미청구공사와 매출채권이 누적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최악의 경우 투입한 인건·설계비가 매몰비용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즉, 정비사업 장기화는 설계사의 재무 부담을 키운다.
지연뿐만 아니라 사업 초기 단계부터 매몰비용 발생 가능성은 존재한다. 수주 경쟁 과정에서 무상 또는 저가 용역이 제공되는 경우가 있어서다. 작성한 설계물의 대가가 감액되거나 지급 시점이 늦어지기도 한다. 인허가 지연이나 정비계획이 변경이 발생하면 감액 또는 지급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
사업시행인가 이후에도 리스크는 있다. 조합 내부 갈등이나 사업성 악화로 사업이 표류할 경우 설계비는 미청구공사나 매출채권 형태로 장기간 남는다. 시공사 교체나 설계 변경 또한 반복되면 기존 설계안이 폐기돼 추가 투입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는 사례 역시 나온다.
한 설계사 관계자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대형 정비사업은 장기적인 매출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핵심 시장이지만 사업 기간이 길고 변수도 많은 만큼 수익성과 사업 추진 가능성, 채권 회수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수주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며 "사업 단계별 리스크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며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설계사, 다른 리스크…발주처 따라 갈리는 현금흐름
모든 설계·CM·PM 업체가 정비사업 리스크에 취약하지 않다. 사업 포트폴리오에 따라 대금 회수 구조와 재무 부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미글로벌(053690)은 정비사업보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 원전, 해외 인프라 등 하이테크·글로벌 PM·CM 사업 비중이 높아 관련 리스크 발생 가능성이 적다. 회사는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4488억원, 영업이익 306억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
삼성전자(005930) 등 대형 민간기업과 공공 발주처 프로젝트 수주가 실적을 이끈 것으로 풀이된다. 하이테크 사업장은 정비사업보다 미수금 리스크 발생 가능성이 적다.
포스코A&C 역시 유사한 사례다. 회사는 건축설계와 주거 설계뿐 아니라 하이테크 CM, 플랜트 CM, 산업시설 설계를 주요 사업으로 영위한다. 포스코그룹 계열사라는 점 또한 상대적인 강점이다.
또 다른 설계·CM 업계 관계자는 "대금 회수 속도만 놓고 보면 정비사업보다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 등 하이테크·산업시설 프로젝트가 상대적으로 빠르고 명확한 편"이라며 "정비사업은 인허가와 조합 의사결정, 설계 변경 등 변수가 많아 사업이 장기화될 경우 대금 회수 시점도 함께 늦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소윤 기자 syoon13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