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확산은 이제 단순한 IT 산업 성장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 전력 인프라 수요 구조까지 뒤흔들고 있다. 초대형 연산을 기반으로 하는 AI 데이터센터는 기존 산업시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전력 공급을 요구하며, 송배전망과 변압기 등 중전기 설비 수요를 구조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전력 투자 사이클을 일시적 호황이 아닌 10년 이상 이어질 구조적 슈퍼사이클로 전망한다. 이에 <IB토마토>는 AI가 촉발한 전력 수요 급증이 중전기 산업의 수주 구조와 생산 전략, 재무 체질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살펴보고, 전력 3사가 선점한 성장 기회를 심층 분석하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권영지 기자]
LS(006260)일렉트릭이 북미 전력시장 내에서 역할과 위상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수배전·배전 변압기 중심 업체로 평가받아온 회사는 최근 초고압 변압기와 송전 영역까지 사업 범위를 확장하며 북미 전력 인프라 밸류체인 전반에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을 기점으로 배전에서 초고압까지 이어지는 성장 경로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력 슈퍼사이클의 대표적인 수혜자로 거론되고 있다.
(사진=LS일렉트릭)
초고압 변압기 계약 증가세 ‘뚜렷’
9일 업계에 따르면 LS일렉트릭이 전력 슈퍼사이클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북미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다.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건설이 잇따르면서 서버룸과 전기실에 필요한 고·저압 수배전반과 배전 변압기 수요가 급증했고, LS일렉트릭은 이 구간에서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레퍼런스를 축적해왔다. 단순 기기 납품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를 통합 공급하며, 북미 빅테크와 민간 전력회사(IOU)를 중심으로 고객 접점을 확대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배전 분야 실적은 초고압 변압기 수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최근 LS일렉트릭의 북미 수주 흐름은 ‘AI 데이터센터 → 배전·수배전 솔루션 → 초고압 변압기·송전’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뚜렷하다. 특히 525kV급 초고압 변압기 계약이 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기존 115kV·345kV급 위주의 포트폴리오에서 한 단계 상위 전압대로 확장하면서, 데이터센터 전원 공급을 담당하는 재생에너지 발전소와 이를 연결하는 송전망 영역까지 사업 범위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북미 대형 유틸리티와 약 4600억원 규모의 525kV급 초고압 변압기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단일 계약 기준 역대 최대급 물량을 확보했다. 이 계약을 포함해 초고압 변압기 관련 수주잔고는 약 2조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파악되며, 전체 수주잔고(4조원대) 가운데 북미 전력 인프라 프로젝트 비중이 절반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525kV급 초고압 변압기는 단순한 물량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공급 기간이 3년 안팎에 이르는 장기 계약이 대부분이고, 대형 유틸리티의 엄격한 품질·납기 기준을 충족해야만 진입이 가능한 영역이어서다. LS일렉트릭 입장에서는 배전 단계에서 신뢰를 확보한 고객이 전압과 물량을 키워 발주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회성 수주가 아닌 장기 파트너십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격 경쟁력·납기 대응력으로 ‘승부’
경쟁 구도를 살펴보면 강점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다. 북미 데이터센터 전력 솔루션 시장은 슈나이더일렉트릭, 지멘스에너지, ABB, 이튼 등 글로벌 ‘빅4’가 장기간 주도해왔다. LS일렉트릭은 시장 점유율과 브랜드 인지도 측면에서는 후발주자지만, 가격 경쟁력과 납기 대응력을 무기로 그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한국·베트남·미국을 잇는 생산 네트워크를 활용해 주문이 들어온 시점부터 실제로 제품이 인도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리드타임·lead time)을 줄이고, AI 서버랙에 최적화된 고밀도 배전 솔루션 역량을 앞세운 점이 북미 데이터센터 고객들에게 매력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반면 초고압·HVDC 송전 분야에서의 글로벌 레퍼런스(검증된 납품 실적)는 경쟁사 대비 아직 제한적이다. 초대형 유틸리티와의 장기 거래 관계 역시 형성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 현지 생산기지가 본격 가동 국면에 접어든 만큼, 현지 조달 체계와 인력 운용, 품질 인증을 얼마나 빠르게 안정화시킬 수 있을지가 주요 과제로 꼽힌다.
생산능력(CAPA)과 투자 전략 역시 주목된다. LS일렉트릭은 미국 텍사스 바스트롭에 북미 전략 거점을 구축하며 중·저압 전력기기 현지 생산과 연구·서비스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단계적으로 추가 투자를 단행해 북미 전력 시스템 허브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리드타임 단축과 관세·수입 규제 리스크 완화, 고객 맞춤형 대응력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국내 부산 초고압 변압기 공장도 북미 전략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부산 기지는 145~550kV급 초고압 변압기 풀 라인업을 생산할 수 있는 통합 거점으로, 증설 이후 생산 능력이 크게 확대됐다. 북미 525kV 프로젝트 역시 부산 공장을 중심으로 공급될 가능성이 크다. 부산과 텍사스를 잇는 이원화 생산 구조는, 부산에서 초고압 변압기를 공급하고 텍사스에서 중·저압 전력기기를 현지 생산하는 체계를 통해 향후 북미 초고압·송전 수요 확대 국면에서 LS일렉트릭의 경쟁력을 뒷받침할 변수로 꼽힌다.
재무성과도 전력 슈퍼사이클의 초입에 있음을 뒷받침한다. 올 들어 LS일렉트릭의 수주잔고는 3분기 기준 약 4조1000억원 수준으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북미 데이터센터·재생에너지·송전망 투자가 겹치는 구간이 2026~2028년까지 이어질 경우, LS일렉트릭의 초고압 변압기와 배전 솔루션 매출이 현재 대비 한 단계 레벨업하는 ‘전력 슈퍼사이클’ 구간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북미 AI 데이터센터 증가는 단순한 설비 수요가 아니라 전력망 재구축 수요"라면서 "배전부터 초고압 송전까지 밸류체인을 아우를 수 있는 기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글로벌 유틸리티와의 장기 계약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AI 데이터센터 확산은 발전설비 증가를 넘어 송배전망 확충을 동시에 요구하는 구조적 변화"라면서 "발전소와 대규모 전력 소비 설비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초고압 변압기와 전력망 투자가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이러한 수요는 향후 10년 이상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권영지 기자 0zz@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