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판지 제조업체 3위 세하의 새 주인으로 한국제지가 선정됐다. 세하 매각 본입찰에는 한국제지, 한창제지, 신대양제지, 범창페이퍼월드 등 복수의 제지업체가 참여했다. 이 중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범창페이퍼월드가 매각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에 대한 효력정지가처분 신청 제기를 고려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범창페이퍼월드는 자사가 제시한 인수가격이 우위에 있음에도 한국제지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암코와 삼일PwC는 공식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딜을 선언한 적이 없다며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IB토마토>는 세하 딜과 관련해 원매자들이 세하를 탐내는 이유와 제기될 소송 전의 쟁점에 대해 살펴봤다.(편집자주)
[IB토마토 박기범 기자] 제지업계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군
세하(027970) 인수전은
한국제지(002300)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까지 인수에 사활을 건 범창페이퍼월드는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변화의 바람이 부는 제지업계 지형도에 '세하'가 태풍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연합자산관리(이하 유암코)와 매각주관사 삼일PwC는 세하의 매각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제지-해성산업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본 계약은 3월 중순 체결할 예정이다. 앞서 있었던 세하 매각에 관한 본입찰에는 한국제지, 파빌리온PE-범창페이퍼월드 컨소시엄,
신대양제지(016590),
한창제지(009460) 등 다수 원매자가 참여했다.
탄탄한 펀더멘털과 범용성 갖춘 세하
주요 제지회사가 세하에 뜨거운 러브콜을 보냈던 까닭은 우선 세하의 실적이다. 지난해 세하는 매출액 1776억원, 영업이익 142억원, 당기순이익 98억원을 냈다. 이는 지난해 보다 각각 0.2%, 41.7%, 84.7% 증가한 것이다. 또한 4년 연속 흑자 행진이기도 하다. 카자흐스탄 투자 실패로 사세가 기울어졌으나, 유암코가 인수한 이후 실적이 턴어라운드 했다.
세하를 인수한다면 백판지 시장에서
한솔제지(213500),
깨끗한나라(004540)에 이어 단숨에 업계 3위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다. 또한 고지 가격 안정이란 기존의 호재 이외에도 신풍제지의 생산 중단이란 추가적인 호재가 있어 향후 전망도 밝다.
또한 제지업계의 지형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감소 중인 한국의 잠재 성장률, 모바일 시장 확대로 감소 중인 인쇄용지·복사용지 수요, 구조적인 공급과잉, 다수의 경쟁사·낮은 전방 교섭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제지업계가 과거 시멘트 산업처럼 시장통합(Consolidation)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하는 지형도의 중심에 있었다. 어느 회사가 세하를 품느냐에 따라 제지 제조업계는 물론 제지 유통업계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야구 '스토브리그'로 비유한다면 FA 1순위인 것이다. 특급 선수의 행선지가 결정되면 차순위 선수의 행선지가 결정되는 것처럼 세하의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 이후 백판지 업계 1위 한솔제지는 323억원 규모의 설비 증설을 발표했다.
세하는 수평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어 범용성도 상당했다. 한국제지는 수평적으로 뻗어나간 예다. 이번 인수로 한국제지는 복사용지-백판지, 골판지 등 주요 용지를 모두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수평적 통합(Horizontal Integration)을 이룬 셈이다. 만약 파빌리온PE-범창페이퍼월드 컨소시엄이 인수했다면 백판지 제조-제작-유통 단계의 수직계열화(Vertical Integration)가 가능했다. 사세 확장뿐만 아니라 큰 폭의 비용 절감 효과가 전망됐다.
이같이 한국제지, 범창페이퍼월드 두 회사 모두 세하 인수 시 상당한 효과가 예상됐다. 아울러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인수·합병(M&A) 매물로 나온
아시아나항공(020560)에 대해 "강남 아파트는 이번에 못 사면 또 다른 매물이 나오겠지만, 아시아나항공은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못 산다"라고 말했다. 범창페이퍼월드 입장에서는 세하 역시 마찬가지의 매물로 이번 인수전은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다. 범창페이퍼월드는 매각 절차가 투명하지 않다며 M&A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프로그래시브 딜이라 믿은 범창페이퍼월드
범창페이퍼월드는 협상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있다. 불복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유의미한 쟁점은 '프로그레시브 딜'여부다. 프로그레시브 딜(Progressive Deal)이란 본입찰에 통과한 인수 후보 등을 대상으로 다시 가격 경쟁을 붙여 매각 가격을 높이는 방식을 말한다. 흔히 경매식 호가 입찰 방식으로 불린다.
범창페이퍼월드 관계자는 이번 딜이 프로그레시브 딜이라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이번 딜이 프로그레시브 딜이었다면 인수가격이 협상의 키였다는 의미다. 그는 "본입찰 이후 3주 동안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지 않았다"면서 "프로그레시브 딜이 아니라면 3주씩 가격을 흥정할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범창페이퍼월드-파빌리온PE 컨소시엄은 지난 21일 상향된 가격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기존 금액보다 11.9% 높은 수준이다. 21일은 본입찰 마감일인 5일로부터 16일이 지난날이고, 매각 측이 가격 상향을 제한한 날(14일)로부터 7일이 지난날이다.
이후 범창페이퍼월드-파빌리온PE 컨소시엄의 세하를 향한 러브콜은 이어졌다. 다음날(22일)에는 최초 금액보다 최대 55.4%를 추가로 써낼 수 있다는 현금잔고증명서를 제시했고, 협상 마감일인 26일에는 추가로 24억원을 더욱 상향 조정한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본입찰 당시 가격을 왜 적게 썼냐는 기자의 질문에 범창페이퍼월드 관계자는 "프로그레시브 딜 과정이 남아있기에 적게 써 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매각 측은 프로그레시브 딜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매각 측 관계자는 "프로그레시브 딜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고지했다"면서 "사전 배포한 안내서에 나온 그대로 진행했다"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매각 측은 이 기간 동안 한국제지와 팽팽한 협상 줄다리기를 벌이며 이견을 좁혀가고 있었다. 즉, 절차대로 진행 중이었다.
박기범 기자 partner@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