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중동 국부펀드의 존재감이 급속히 부상하고 있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미래 산업으로 눈을 돌린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등 주요 산유국들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앞세워 기술·인프라·금융 분야로 투자 영역을 넓히며 시장 판도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과거 단순한 재정 투자자에 머물렀던 이들은 이제 '글로벌 자본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하며 세계 자본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IB토마토>는 중동 국부펀드의 투자 확대가 국내 사모펀드(PEF)와 벤처캐피탈(VC) 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짚고 향후 자본 유입 가능성과 대응 전략을 모색해본다.(편집자주)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중동 국부펀드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국내 하우스들이 관계 설정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주요 운용사들이 자금 유치에만 열을 올리느라 실패 사례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들어 걸프협력이사회(GCC) 기관투자자들이 수동적인 자금 배분을 넘어 공동투자권이나 딜에 대한 접근권, 측정 가능한 ESG 요소 등을 요구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펀드레이징 리서치 기관 다코타(Dakota)에 따르면 지난해 중동 국부펀드들은 전 세계적으로 총 1360억달러(약 190조원)를 투자했다. 전 세계 국부펀드 자금 흐름의 54%가 GCC에서 비롯된 셈이다. GCC 국부펀드는 단순한 자산 다변화가 아닌, 경제 구조 변혁을 이끄는 전략적 투자자로 변모했다.
실제로 사우디 국부펀드 PIF는 자산의 37%를 대체투자에 배분했으며, UAE 국부펀드 ADIA는 부동산, 인프라, 사모투자 등 대체투자 비중이 32%로 전 세계 연기금 평균을 크게 상회한다. 주식·채권 같은 전통자산 대신 실물자산·비상장자산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구성했다는 것이다.
파트너십 강조…출자액 50% 수준의 공동투자 집행 늘어나
다코타는 GCC 주요 국부펀드 7대 기관의 투자 성격을 분석하면서 중동 국부펀드를 유치하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 구조적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략적 진화(Strategic Evolution) △파트너십(Partnership Over Products) △ESG(ESG as Entry Requirement) 등이다.
GCC 기관투자자들은 투자 포트폴리오와 관련한 맞춤형 구조, 공동투자, 국가 비전과의 전략적 일치성을 요구하는 추세다. GCC 관계 구축의 3대 원칙으로 다수 대면 미팅과 현장 방문을 꼽았다. 최종 의사결정까지 12~18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어 라마단 일정 존중과 샤리아(이슬람 금융) 원칙에 대한 이해, 의사결정 구조 파악 등이다.
특히 최근 GCC 기관투자자(LP)은 단순 투자가 아닌, 펀드 출자액 최소 50% 수준의 공동투자 권한을 요구하고 있다. 일례로 올해 초 무바달라는 베인캐피탈이 주도한 독일 시설관리 업체 아플레오나 인수 컨소시엄에 참여하면서 동반 투자자 성격으로 참여한 바 있다.
관련 업계에선 GCC 기관투자자들과 공동투자 기회를 정기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글로벌 벤치마크에 뒤처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본시장 분석 기관 아이온애널리틱스(ION Analytics)에 따르면 EQT, PAG 등 대형 하우스들은 1대1 공동투자 구조를 정착시켰고, 미드 마켓 운용사들은 아직 제도화·프로세스 측면에서 따라잡는 단계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EQT는 10년 전 아시아 지역의 6호 펀드(약 38.5억달러)를 통해 공동투자를 본격화했고, 이는 이후 공동투자 표준화의 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PAG 링컨 팬 공동대표는 아이온애널리틱스의 보고서에서 “펀드 사이즈의 50%에 해당하는 공동투자를 상시로 창출하지 못하면 글로벌 펀드 벤치마크에서 밀린다”고 설명했다.
ESG, 선택이 아닌 필수…까다로운 유치 조건 '발목'
중동 국부펀드 ESG도 강조한다. GCC 기관투자자들은 ESG를 정책 도구이자 경쟁력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사우디의 경우 ‘비전 2030’, UAE는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 제로(0)를 목표로 하는 ‘넷 제로 2050’을 통해 ESG를 강화하는 추세다.
중동 국부펀드는 위탁운용사(GP)에 대한 출자나 투자 과정에서 ESG 통합정책과 전담팀 보유 여부, 탄소감축·고용창출 등 정량적 지표, 기후변화관련재무정보공개협의체(TCFD)·지속가능금융공시규제(SFDR) 등 국제 기준 보고체계, 자국의 지속가능한 목표와의 연계 등을 따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코타는 중동 국부펀드와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유럽 운용사들은 가장 크거나 오래된 하우스가 아니라며 전략적 접근과 문화적 이해, ESG 연계, 장기적 파트너십 구축 등의 능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PIF는 ‘비전 2030’과 연계된 기술이전·고용창출을 중요시하고 있으며, ADIA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운용능력 요구하는 등 각각의 국부펀드의 특징 파악을 통해 단순한 LP가 아닌 10년짜리 전략 파트너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한편 국내에선 올해 초 UAE 3대 국부펀드인 아부다비투자위원회(ADIC)가 한국 내 주식투자를 맡아줄 운용사로 트러스톤자산운용과 쿼드자산운용, 페트라자산운용 등 3곳을 숏리스트로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후속 절차는 감감 무소식이다.
최근에는 VIG파트너스가 UAE 국부펀드 무바달라와 컨소시엄을 꾸려 진행했던 카카오모빌리티 인수합병(M&A) 딜이 좌초되면서 중동 국부펀드로부터의 자금 유치가 까다롭다는 평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사우디 PIF의 경우, 사모펀드에 대한 출자에 대해선 10억달러 이상의 대규모 자금을 굴릴 전략적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하우스들의 출자는 사실상 힘들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국내 대형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는 <IB토마토>에 “국내 사모펀드 운용자산(AUM) 규모 1, 2위인 MBK파트너스나 한앤컴퍼니 정도가 중동 국부펀드로부터 출자를 받았지만, 나머지 운용사들의 출자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라며 "한국 사무소를 운영하는 중동의 국부펀드가 전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본격적인 투자를 이끌어내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