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가 한국 첨단산업의 새로운 생산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텍사스주 오스틴·테일러에는 반도체 투자가 이어지고, 조지아주 서배너 일대에는 자동차·배터리 공장과 협력업체들이 모여들고 있다. 공장을 세우고 생산라인을 가동할 한국인 엔지니어와 기술 인력도 함께 향하지만, 투자 규모와 생산능력에 가려 이들의 생활과 노동환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업무에 맞는 체류자격부터 주거와 의료, 체재비 부담까지 현장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사고나 비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여력이 부족한 중소 협력사와 파견근로자들의 사정은 더 어렵다. <IB토마토>는 미국 현장에서 생산기지를 움직이는 한국인들과 중소 협력사를 만났다. '테크벨트의 한국인들' 4부작을 통해 대기업의 해외 투자 이면을 들여다보고, 동반 진출을 뒷받침할 지원과 보호 장치를 짚는다.(편집자주)
※기사에 등장하는 일부 기업과 근로자는 신원 공개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해 익명을 요청했습니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해당 기업명과 개인 신원을 밝히지 않습니다.
현대차그룹이 미 조지아 서배너 일대에 조성한 메타플랜트 공장 전경(사진=현대차그룹)
[IB토마토 김규리 기자] 지난해 9월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005380)·
LG에너지솔루션(373220)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대규모 이민 단속이 벌어진 지 1년.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파견 근로자들은 기업들이 출국 전 업무와 체류자격을 확인하는 절차를 강화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비자를 갖춰 미국에 도착한 뒤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현지 업무를 마치면 한국 본사와의 업무가 시작됐고, 은행 계좌를 만들지 못해 급여를 받지 못한 채 돈을 빌려 생활한 직원도 있었다.
정부와 영사관의 지원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근로자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더뎠다. <IB토마토>가 조지아주에서 만난 협력사 직원들은 사회보장번호(SSN) 발급부터 주거와 의료비, 가족의 정착까지 직접 챙겨야 했다고 말했다. 체류자격을 확인하는 절차와 별개로 장시간 노동과 생활 부담, 사고가 났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보호 제도는 현장에서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었다.
현지 업무 끝나면 본사 업무…밤까지 이어지는 하루
미국 조지아주에서 한 공장의 생산시설을 관리하는 C씨에게 오후 5시는 하루 업무가 끝나는 시간이 아니다. 현지 직원들이 퇴근한 뒤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나면 한국 본사의 업무가 시작된다.
C씨는 <IB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현지 업무를 오후 7시쯤 마치면 한국의 업무가 시작된다. 본사와 소통하며 일을 처리하다 보면 밤 10시나 11시를 넘기기 일쑤"라고 털어놨다. 토요일에도 대부분 출근한다. 그는 "미국에 온 뒤 토요일에 쉰 적이 거의 없다. 주말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라며 "한국과 시차가 있어 본사와 소통하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한다"라고 털어놨다. 해외 근무 경력이 10년 넘은 그에게도 미국의 근무 강도는 높았다.
미국 조지아주 한 생산공장에서 일하는 협력업체 직원들이 <IB토마토>와 인터뷰하는 모습.(사진=김규리 기자)
지난 9월3일(현지시간) <IB토마토>는 조지아주 자동차 생산거점에서 일하는 1차 협력사 소속 A씨와 2차 협력사 소속 B씨, C씨를 만났다. 이들이 일하는 현장에서는 2차 협력사가 만든 부품이 1차 협력사로 넘어간다. 부품은 인근 공장에서 모듈로 조립된 뒤 완성차 공장에 공급된다. 완성차 생산라인을 움직이기 위해 여러 단계의 협력사와 파견 인력이 함께 일하는 구조다.
미국에 온 지 1년 8개월가량 된 B씨가 파견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자녀였다. 그는 "아이들이 다른 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훗날 성장하는 데 미국에서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가족이 함께 새로운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도착 직후부터 생활에 필요한 행정절차가 막혔다. B씨는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급여를 받기 위해 사회보장번호(SSN)를 신청했지만 발급 안내를 받지 못했다. 근무 시간을 쪼개 담당 사무실을 직접 찾아갔고 거주 주소 문제까지 겹치면서 여러 차례 다시 방문해야 했다.
B씨는 "사회보장번호를 받기까지 3~4개월이 걸렸다. 그전에는 은행 계좌를 개설하지 못해 월급도 받을 수 없어 돈을 빌려 생활했다"며 "배우자 역시 번호를 받는데 3개월이 걸렸지만 어디에 도움을 구해야 할지 몰랐다"고 털어놨다. 자녀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려던 미국 생활은 급여를 받아 가족의 일상을 꾸리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생활비 부담도 예상보다 컸다. C씨는 회사가 주거와 의료 관련 비용을 지원하지만 현지 지출을 모두 감당할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물가가 10% 올라도 회사의 지원액 인상률은 3~5% 수준에 그친다. 차액은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며 "의료체계와 처리 절차도 복잡해 필요할 때 치료받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점은 파견 생활의 장점으로 꼽혔다. A씨는 영어로 소통하거나 한식 재료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가족이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수월하다고 했다. 다만 가족 동반에는 또 다른 선택이 따른다. 배우자가 한국에서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할 수 있어 경력 단절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구금 사태 1년, 파견 절차 바뀌어도 인력 확보는 난항
지난해 9월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들이 대거 구금된 사건은 이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당시 단속 현장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한국에서 새로 들어올 직원들의 파견 방식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조지아 주청사 전경.(사진=김규리 기자)
A씨는 과거 장기 출장자가 전자여행허가(ESTA)로 입국해 허용된 체류기간을 채운 뒤 한국에 잠시 다녀와 재입국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고 전했다. 단속 이후에는 그가 접한 기업들이 출장 목적과 체류자격이 맞는지 파견 전에 확인하는 움직임은 이전보다 강해졌다.
그는 "현재 일하는 현장에서는 비자와 관련해 큰 문제를 겪지 않고 있다"며 "파견 절차가 달라진 것은 정부 정책보다 회사가 자체적으로 기준을 강화한 영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2차 협력사에서 일하는 C씨는 필요한 기술 인력을 제때 데려오는 일이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이 추진하는 공장에는 1차, 2차 협력업체의 기술 인력이 함께 들어와야 하는데 비자 문제로 필요한 사람이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라며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직원의 E-2 비자 전환이 보류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인력이 급히 필요하면 다른 직원을 대신 투입하거나 ESTA를 활용해 단기 출장을 보내는 사례도 남아 있다고 했다. 출국 전 확인 절차는 강화됐지만, 현장에 필요한 인력을 적절한 체류자격으로 확보하는 문제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C씨는 "어떤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지 현장에서는 체감하기 어렵다"며 기술 인력의 파견 수요를 고려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자 확인 넘어, 산재·초과근무 보호도 점검해야
조지아·알라바마 주에서 노동법 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김진혁 변호사와 인터뷰하는 모습.(사진=김규리 기자)
조지아주에서 노동 사건을 다뤄온 김진혁 변호사는 기업들의 점검이 체류자격 확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어떤 일을 맡기는지, 어떤 고용 조건에서 일하는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ESTA로 입국한 인력이 허용되지 않는 업무를 하고 귀국한 뒤 다른 인력이 같은 방식으로 들어오는 관행에 대해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지켜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현지에서 기술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정이 체류자격에 맞지 않는 업무를 맡길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취지다.
여러 단계로 이어지는 협력사의 고용 구조도 짚었다. 김 변호사는 "조지아주 자동차 산업은 원청 아래 여러 단계의 협력업체가 이어지는 구조"라며 "하위 협력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대기업은 교육과 관리 체계를 통해 이를 예방하고 대응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원청도 협력사의 근로 형태와 파견 인력의 체류자격을 사전에 점검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대응할 체계를 마련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기업과 근로자 모두 현지법을 숙지해야 한다며 부적절한 고용 관행을 방치하면 한국 기업 전체의 신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근로자들이 걱정하는 산업재해와 임금 문제에 대해서도 김 변호사는 현지법에 따른 구제 절차가 있다고 짚었다. 조지아 주법상 회사(고용주)는 단 3명만 채용해도 의무적으로 산재보험을 가입하고, 사고 발생 시 즉시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는 "파견근로자이거나 체류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도움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조지아주에서 일하다 다쳤다면 현지법에 따라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재해의 처리와 보상 기준은 주마다 다른 만큼 사고가 발생한 지역의 법을 살펴야 한다는 설명이다.
초과근무 수당 역시 파견근로자라는 이유만으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미국 연방법상 적용 대상 근로자가 한 주에 40시간을 넘겨 일하면 초과근무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에 위치한 기아 공장 전경.(사진=김규리 기자)
김 변호사는 이어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투자와 공장 설립을 통해 현지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만큼 현지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파견 인력에 대한 지원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파견 근로자들도 한국과 다른 현지 법규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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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김규리 기자 kkr@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