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PEF) 시장에 투자 대기자금은 쌓이고 있지만, 기존 투자금을 회수할 출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인수·합병(M&A) 시장 침체로 포트폴리오 기업의 매각이 지연되자 운용사(GP)들은 기업의 차입 여력을 활용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리캡에 눈을 돌리고 있다. 기업을 매각하지 않고도 출자자(LP)에게 현금을 돌려줄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그 대가로 포트폴리오 기업에는 늘어난 부채와 이자 부담이 남는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으로 평가된다. 특히 차기 블라인드펀드 결성을 앞둔 GP들 사이에서는 장부상 수익률보다 실제 분배 실적을 보여주는 DPI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이에 <IB토마토>는 회수 시장의 돌파구로 떠오른 리캡의 확산 배경과 그 이면의 위험을 짚어본다.(편집자주)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포트폴리오 기업을 매각하는 대신 차입을 늘려 투자금을 회수하는 리캡에 잇따라 나서고 있다. 인수·합병(M&A) 시장 경색으로 포트폴리오 기업의 매각이 막히자, GP들이 자산을 파는 대신 차입을 늘려 투자금을 조기 회수하는 방식을 택하고 나선 것이다.
국내 PEF 시장의 외형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태다. 지난해 기관 전용 PEF의 신규 출자약정액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고, 미집행 약정액(드라이파우더) 역시 40조원을 돌파하며 시장에 돈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새 자금이 유입되는 속도만큼 기존 투자금 회수가 원활한 것은 아니다.
특히 차기 블라인드펀드 결성을 준비하는 GP들은 장부상 수익률뿐 아니라 실제 현금 회수 실적을 뜻하는 DPI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GP들로서는 장부상 수익률(IRR)만으로는 까다로워진 LP들의 지갑을 열 수 없는 처지다. 실제 현금으로 돌려받은 분배율(DPI) 증명 압박이 커면서, 리캡이 얼어붙은 M&A 시장과 다음 펀드레이징 사이를 잇는 핵심 유동성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구글 생성 이미지)
매각이나 기업공개 없이도 현금 확보
리캡은 리캐피털라이제이션(Recapitalization), 즉 자본재조정의 줄임말이다. PEF 시장에서는 통상 포트폴리오 기업이나 이를 보유한 특수목적법인(SPC)이 새로 대출을 받은 뒤 조달 자금을 주주에게 배당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PEF가 자기자본 1000억원을 투입해 인수한 기업의 실적을 개선했다고 가정한다면, 인수 당시보다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이 늘고 기존 차입금이 줄었을 시 금융기관이 인정하는 부채 수용 여력도 그만큼 커진다. 이때 해당 기업이 700억원을 새로 빌려 배당하면, GP와 출자자 LP는 경영권을 유지하면서도 투자원금의 70%를 선회수하게 된다.
이처럼 제3자 매각이나 기업공개(IPO) 없이도 현금을 쥘 수 있다는 점이 리캡의 핵심이다. GP 입장에서는 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회사를 넘기는 대신 원금 일부를 건진 채 매각 시점을 늦추며 보유 기간을 늘릴 수 있다. 통상 기존 인수금융을 재조정하는 리파이낸싱과 동시에 진행되며, 신규 대출로 기존 빚을 갚고 늘어난 한도만큼 배당이나 출자금 환급에 활용한다.
다만 리캡은 최종 엑시트가 아닌 임시방편이다. PEF가 회수한 투자금의 이자 비용과 새 차입금 상환 부담은 고스란히 포트폴리오 기업의 몫으로 남는다. 기업가치 상승분을 조기에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카드라는 평가와, 미래 현금흐름을 무리하게 앞당겨 주주 배를 불리는 '차입 배당'이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는 이유다.
돈 넘쳐도 경영권 인수는 '신중'…투자방식 변화
투자 여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5년 기관전용 PEF 신규 출자약정액은 27조8000억원으로 전년보다 44.8% 증가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전체 출자약정액은 167조5000억원, 아직 투자되지 않은 미집행 약정액은 43조2000억원으로 집계됐다. 미집행 약정액은 1년 전보다 7조1000억원, 19.7% 늘었다.
문제는 자금 조성 속도에 비해 이를 투입할 만한 매물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신규 출자약정액이 크게 증가했는데도 미집행 약정액이 함께 불어난 것은 매도자와 매수자 간 기업가치 눈높이 차이로 M&A 거래가 지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에 투자할 돈은 쌓였지만, 전통적인 경영권 인수 거래에는 신중해진 셈이다.
이 같은 흐름은 투자 방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지난해 바이아웃 등 경영참여형 투자액은 23조7000억원으로 전년보다 소폭 감소했다. 반면 기업대출과 메자닌 등 비경영참여형 투자는 1조원에서 4조4000억원으로 4배 이상 늘었다. 기업을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전통적인 방식보다 대출과 전환사채(CB), 상환전환우선주(RCPS) 등 구조화 투자를 통해 수익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지표로 부상한 것이 바로 DPI다. DPI는 LP가 납입한 출자금 대비 실제 현금으로 돌려받은 누적 분배금의 비율이다. IRRsms 아직 매각하지 않은 자산의 현재 장부상 평가가치(NAV)도 회수된 것으로 가정하여 합산하기 때문에, 오직 '실제 현금 지급'으로만 수치를 올릴 수 있는 DPI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LP들은 기존 펀드에서 회수한 분배금을 다시 신규 펀드의 출자 재원으로 활용한다. 기존 투자금은 묶인 채 새 펀드의 캐피털콜(출자 요구)만 이어지면 LP의 유동성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GP 역시 아무리 장부상 기업가치를 높였어도 DPI를 증명하지 못하면 회수 능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차기 펀드레이징의 생사권을 쥔 LP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원금을 먼저 돌려줘야 하는 압박이 커지는 구조다.
한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최근 LP들은 장부상 수익률보다 실제로 얼마를 회수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라며 "M&A 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차기 블라인드 펀드를 결성하려면 리캡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현금을 만들어 분배 실적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