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 이른바 '캐즘' 구간이 장기화되면서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에 힘을 싣고 있다. ESS는 탄소중립 실현과 재생에너지 확대, 전력망 안정화 등 정책·산업적 수요가 맞물리며 폭발적인 성장 잠재력을 지닌 분야로 평가받는다. <IB토마토>는 이번 기획을 통해 ESS 시장에서 배터리 3사가 펼치는 사업 전략과 기술·안전 과제, 글로벌 경쟁 구도, 그리고 재활용·재사용을 포함한 미래 생태계의 변화를 집중 조명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권영지 기자] 에너지저장장치(ESS)가 글로벌 전력 산업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면서 ‘운영 효율성’이 새로운 경쟁 기준으로 부각되고 있다. ESS가 더 이상 단순한 에너지 저장 설비가 아니라 전력거래시장 참여와 AI 전력 수요 대응, 도시 단위 에너지 운영까지 역할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하고 제어하는지가 사업성과와 직결되는 구조가 됐다. 에너지 저장 설비를 갖추는 것에서 운영을 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단계로 접어들면서 이를 둘러싼 글로벌 기술 격차와 시장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되는 분위기다.
전시된 ESS의 센서를 가리키고 있는 배터리 기업 관계자.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ESS 시장, 연평균 22% 성장
26일 블룸버그NEF가 최근 발표한 ‘ESS 시장 전망’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시장은 지난해 6687억달러 규모에서 2034년 5조1200억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며, 현재 연평균 성장률은 21.7%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영향으로 ESS 투자가 본격화되며 2034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29.1%에 이를 것으로 분석됐다.
ESS 수요 구조에도 변화가 뚜렷하다. 기존에는 태양광·풍력 변동성 보완과 전력 피크 대응이 주목적이었다면 앞으로는 전력거래시장(VPP·DR) 등 직접적인 수익 기반 모델이 확대되는 구조로 수요 구조가 바뀌고 있다. ESS가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새로운 시장 기회로 이어지고 있으며, 전력거래 연계 비즈니스 모델이 핵심 확장 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수천 가구의 주택이 ESS를 연계한 가상발전소(VPP)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전력거래를 통한 추가 수익을 얻고 있다. 중국과 인도 역시 국가단위로 ESS 도입을 확대하며, 대규모 재생발전소와 산업단지에 ESS가 결합되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ESS 시장은 친환경 에너지로의 패러다임 변화와 민관 투자 확대에 힘입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요 기업들은 첨단 배터리 및 그리드 솔루션 기술을 선보이며, 시장 환경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혁신 사례로는 미국 폼에너지(Form Energy)가 있다. 해당 기업은 기존 ESS 배터리 방전 수명 한계를 넘어 최대 100시간 연속 전력 공급이 가능한 초대형 배터리를 개발해, 재생에너지가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인공지능(AI)과 에너지 저장 기술의 융합도 눈에 띈다. 스탠다드에너지와 리벨리온은 AI 기반 전력 솔루션과 바나듐 이온 배터리(VIB) 기술을 결합해, AI 서버랙의 고출력 전력 수요를 초속응으로 지원하는 혁신적 ESS 모델을 선보였다. 해당 솔루션은 AI 산업의 전력 사용 불규칙 문제를 해결하며, 국내외 AI 전력 인프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기업들은 에너지저장관리시스템(ESMS) 도입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 선전아야테크놀로지의 AI 기반 ESMS는 산업 현장에서 전력 사용 최적화와 비용 절감을 실현하며 운영 물류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지능형 솔루션이 ESS 운영의 혁신을 주도하는 한편, 재생에너지와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글로벌 ESS 시장 규모 전망치. (자료=블룸버그NEF)
민간-공공 협력 모델로 시장 수요 대응
이처럼 ESS는 단순한 배터리 저장을 넘어 AI 통합 솔루션, 지능형 에너지관리시스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정책은 산업 진화 속도를 더욱 끌어올리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다. 미국 IRA는 ESS 단독 설비에도 세제 혜택을 지원하고 있으며, 유럽 그린딜도 ESS를 계통 안정화 핵심 수단으로 규정해 인센티브를 확대해왔다. 그 결과 ESS 프로젝트는 전력 관리 영역뿐 아니라 민간-공공 협력 모델을 기반으로 도시·국가 단위 운영 체계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뉴욕 등 여러 주에서 정부와 민간 투자자들이 손잡고 대규모 ESS 설치를 추진 중이다. 웨너지사는 3.47MWh 배터리 시스템과 6.95MWh 태양광 저장 충전 솔루션을 미국 내 주요 신재생 프로젝트에 납품하며, 에너지 효율성 향상과 운영비용 절감을 이끌고 있다. 유럽에서도 다양한 민관 협력 모델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에넬과 미국의 에너지볼트는 중력기반저장장치를 대형 그리드에 도입해 재생에너지 변동성 문제를 개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과 유럽의 민관 협력 ESS 프로젝트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 거래시장 참여를 가속화하는 핵심 동력이 되면서, 도시 및 국가 단위 전력 운영 체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정책과 민간 기술 혁신이 조화를 이루며 청정에너지 전환의 실질적 성공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국내에서도 민간과 공공이 협력한 ESS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경기도와 고양시가 추진하는 국내 최초 ‘공유형 ESS 실증사업’이 대표적이다. 해당 사업은 경기도와 고양시, 한국전력공사, LS일렉트릭이 공동 협력해 과잉 생산된 전기를 저장하고 필요 시 방출하는 방식으로 전력망 안정화를 도모하는 프로젝트다.
제주도의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 시범사업과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한 K-MEG(Korea Micro Energy Grid) 프로젝트도 민관 협력을 중심으로 추진된 주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들 사업은 재생에너지 연계형 마이크로그리드와 ESS를 결합해 지역 단위에서 에너지 자립과 최적 운영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ESS 산업은 기술 발전, 정책 지원, 민관 협력 모델 확산이 맞물리며 기존 에너지 체계를 대체하는 핵심 인프라로 점차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히 EV 산업이 공급망과 배터리 경쟁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면, ESS 산업은 전력시장 참여·AI 운영·재생에너지 연계 등 확장성이 훨씬 넓다는 점에서 산업적 파급력이 더 클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ESS가 단기 트렌드가 아닌 에너지 전환 시대의 구조적 산업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에너지 저장체계가 전력 체계의 중심에 자리하는 만큼, 향후 글로벌 시장 경쟁이 배터리 제조 역량을 넘어 전력 운영과 시장 설계·서비스 사업 모델까지 포함하는 종합 역량 경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업과 정책 모두 대응 속도를 높여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AI 기반 전력망 운영과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ESS 역할이 한층 확대되고 있다. 특히 VPP·DR 등 전력시장 연계 모델이 본격화되면 ESS는 단순 장비가 아니라 에너지 최적화를 위한 핵심 운영 자산"이라며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업계도 사업 모델을 빠르게 재정비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권영지 기자 0zz@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