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 빠진 칼라일…현대차그룹, '백기사 동맹' 문제없나
현대글로비스 지분 10% 보유…우군으로 여겨졌던 이 CEO 사퇴
고배당 구조 만들면 기업 가치 하락 우려…지배구조 개선 '실탄' 줄 수 있어
공개 2022-08-16 06:00:00
[IB토마토 이하영 기자]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에 칼라일그룹(칼라일)이라는 복병을 만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에 우호적인 한국계 이규성 칼라일 최고경영자(CEO)가 돌연 사퇴하면서 칼라일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086280) 지분이 우호 지분에서 적대 지분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칼라일이 향후 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기업가치 상승이 필요한 현대글로비스에 악영향을 미쳐 주가가 하락할 경우 ‘실탄’ 규모가 작아지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운신의 폭도 좁아질 수 있다.
  
11일 블룸버그통신 등 다수 외신에 따르면 칼라일은 지난 7일(현지 시각) “이규성 CEO와의 5년 계약이 올해 말 종료됨에 따라 이사회와 이 CEO는 새로운 CEO를 발굴하는 것에 상호 합의했다”라고 밝혔다. 칼라일은 당분간 빌 콘웨이 칼라일 공동창업자 겸 비상임 공동회장이 임시 CEO 체제로 운영한다.
 
이규성 전 칼라일그룹 CEO(왼쪽)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사진=연합뉴스, 현대글로비스)
 
외신에서는 CEO 겸 이사회 의장을 맡았던 이 CEO의 사퇴에 주가 부진과 그룹 내 알력 싸움, 연봉 협상 결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신임CEO와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오래된 간부 사이에 긴장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라며 사내 알력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언급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CEO가 새로운 거래를 위한 계약 제안을 했으나, 이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이사회가 연봉 협상 중 계약 연장 불가 판정을 내렸고 곧장 이 CEO의 사임의사로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CEO는 스톡옵션을 포함해 연봉 3억 달러(약 3921억원)을 제시했으나, 이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KR CEO 연봉이 5억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 제시안도 높은 수준은 아니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은 칼라일이 지난해 3분기 순이익이 5억3280만 달러를 기록해 주당순이익(EPS) 1.46달러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할 정도로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재 칼라일 주가는 올해 초와 비교해 37%가량 빠진 상태다. 동시기 동급 사모펀드인 블랙스톤과 KKR 주가가 각각 20.3%, 29.6%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7~17% 정도 더 하락한 셈이다. 주가 하락을 빌미로 이사진이 이 CEO의 연봉 인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이 사퇴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현대글로비스다. 올해 초 정몽구(6.71%) 명예회장과 정의선(3.29%)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총 10%를 약 6113억원에 칼라일 특수목적법인인 프로젝트 가디언스 홀딩스에 블록딜(시간외 대량 매매)로 매각했다. 이는 강화된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피해 가면서 오버행(잠재적 매도 대기 물량) 이슈를 일거에 해소해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신의 한 수’로 불릴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이번 블록딜로 총수일가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은 정 회장 몫 19.9%만 남게 됐다. 지난해 12월30일 시행된 개정 공정거래법은 총수일가 보유 지분율 20% 이상일 경우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으로 포함한다. 현대차(005380)기아(000270)의 완성품 자동차 운송 파이프라인인 현대글로비스는 0.01%차로 아슬아슬하게 공정거래법상 내부거래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한국계 이규성 칼라일 CEO 돌연 사임에 '셈법 복잡'
 
그러나 양측 블록딜에서 우호 지분의 중심을 잡아주던 이 대표가 칼라일에서 빠지게 되면서 현대글로비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칼라일이 우군인 백기사가 아닌 ‘적군’인 공격적 투자자가 될 경우 경영에 큰 암초를 만날 수 있어서다.
 
칼라일은 지난 1월 블록딜에서 태그얼롱(동반매도청구권)과 이사 1인 지명권을 요구했다. 태그얼롱은 최대주주인 정 회장이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매도할 때 칼라일이 자사 보유지분 10%도 같은 가격에 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재무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함께 요구한 이사 1인 지명권은 경영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번에 칼라일 측 인사인 엘리엇 메릴은 지난 3월23일 주주총회에서 임기 3년의 이사로 선임됐다. 기타비상무이사는 사내에서 경영 관련 일을 직접적으로 맡지 않으나 비상임이사로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 상법상 주주총회 선임절차를 거쳐 임명 및 등기된 이사는 그 직무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칼라일 측 기타비상무이사인 엘리엇 역시 그렇다. 칼라일 측 인사가 2025년 3월까지 현대글로비스 경영에 참여할 적법한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당초 칼라일 측 인사의 현대글로비스 이사회 영입은 긍정적으로 해석됐다. 블록딜 자체가 2018년부터 이어온 정 회장과 이 CEO의 친분에 기댄 만큼 경영진에 칼라일이 ‘우군’이란 인식이 강해서다. 사측과 태그얼롱으로 묶여 있어 칼라일 또한 현대글로비스 지분 가치를 높여야 향후 보다 높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블록딜 체결 이후 IB업계에서는 “칼라일이 현대글로비스 경영에 도우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지분가치 하락 리스크…지배구조 개편 차질 빚나
 
그러나 이 CEO가 제외된 현재 칼라일이 다른 방향으로 지분가치를 높이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모펀드가 돈을 버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투자한 회사의 가치를 상승시켜 보유 지분을 높은 가격에 팔아 차익실현 하는 방법과 고배당 구조를 만들어 현금창출 곳간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칼라일이 후자로 기업 방향을 이끌어 가는 것이 성공한다면 현대글로비스는 제대로 된 성장은 하지 못한 채 현금창출에만 힘쓰다 도리어 기업가치가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 회장이 지분을 다수 보유한 계열사로 현대엔지니어링(11.72%) 등과 함께 지배구조 개편의 ‘실탄’으로 예상됐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선은 정 회장이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012330)의 대주주가 되어야 완성된다. 그러나 정 회장이 현재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은 0.3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이 다수 지분을 보유한 현대글로비스의 레벨업과 현대엔지니어링의 상장 등으로 지배구조 개편에 필요한 자금을 수혈받을 것으로 전망됐다.
 
현대글로비스가 고배당 기조를 이어갈 경우 지배구조 개편에 필요한 자금 일부를 모을 수 있으나, 지분 매각보다 그 양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앞서 정 회장이 현대글로비스 지분율 23.9%로 받은 배당금이 한 해 200억~300억원대인데 반해, 정 부자의 지분 10%의 매각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6000억원이 넘는 것과 비교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또 고배당에 집중하면 성장에 필요한 자금 수혈이 정체돼 지분 가치 하락 위험도 있다. 이 경우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을 위한 충분한 자금이 모이지 않기 때문에 지배구조 개편이 더 지체될 가능성도 있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외국계 자본으로 인해 지배구조 개편에 쓴물을 삼킨 바 있다. 소액 주주인 엘리엇이 2018년 현대자동차에 지속적으로 주주환원요구와 지배구조개편 반대 입장을 전개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주주총회에서 엘리엇을 누르고 실력을 행사했지만, 장기간 공들였던 지배구조 개편은 좌절됐다. 당시 엘리엇이 보유한 현대차그룹 지분은 현대자동차와 기아, 현대모비스 등 각각 3.0%, 2.1%, 2.6%에 불과했다.
 
칼라일은 명실상부한 현대글로비스 3대 주주다. 20% 가까이 지분을 보유한 정 회장과는 차이가 꽤 나지만 지분 11%로 2대 주주를 차지하고 있는 덴 노르스케 아메리카린제 에이에스(노르웨이 해운그룹 빌 빌헴슨 아사의 자회사)와는 단 1%의 지분율 차이만 있을 뿐이다. 기타비상무이사 외에 보유 지분 만으로도 충분히 경영 간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김성호 법률사무소 자산 대표변호사는 “현대글로비스의 칼라일 내 임원은 비상임이사로서 이사회 경영 방침에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칼라일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 거란 의견도 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현대글로비스가) 부정한 방법으로 경영을 하고 있지 않아 이슈 될 만한 부분은 없을 것”이라며 “태그얼롱 역시 양쪽 합의 하에 한 계약으로 문제의 소지가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IB토마토>는 현대글로비스 측에 수차례 입장을 요청했으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하영 기자 greenbooks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