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여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TV나 신문마다 신용카드 광고로 도배되던 시절이 있었다. 현금 없이도 소비가 가능했고 현금이 필요하면 대출까지 해준다고 했다.
지갑에 꽂혀있는 신용카드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있어 보였다”. 광고 효과는 톡톡했다. 이십대의 젊은 나를 제대로 자극했고 연회비를 면제해 준다는 아주머니의 달콤한 멘트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당시 일정한 수입이 없는 복학생 신분이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입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얼마 후 내 지갑 속에는 신분상승이라도 된 것 마냥 체크카드와는 다른 신용카드가 꽂혀있었다. 이미 카드가 있으니 다음부터는 카드사가 직접 확인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두달 새 신용카드가 3장이나 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취업을 한 덕에 쪽박은 면할 수 있었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때 발급 카드 수가 1억장을 넘겼다. 웬만한 성인이라면 카드 1~2장은 기본이었다. 돌려막기의 서막이었다.
당시 금융교육도 못 받은 젊은 세대들은 소득 없이 카드를 긁어 댔고 이른바 ‘카드 빚’에 쫓기는 청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2003년 전체 신용 불량자 중 신용카드가 원인인 경우가 60%가 넘었다. 카드 연체율은 2005년 8월 3.8%로 정점을 찍었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에 벌어진 ‘카드 대란’이다. 이렇게 21세기 첫 경제위기는 카드에서 비롯됐다.
최근 은행 신용카드 대출 연체율이 1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나타났다. (출처=연합)
최근에도 카드 대란 재현이 우려되는 신호가 감지됐다.
30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일반은행의 신용카드 대출금 연체율(하루 이상 원금 연체)은 지난 2월 말 기준 3.4%를 기록했다. 10년 내 최고치다. 카드 사태 당시 3.8%에 비해 0.4%p 차이만 날 뿐이다.
한은은 아직 신용위험 수준은 아니라며 일축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최근 “통화량이나 주담대를 보고 금융시장에서 '이미 (기준금리 수준이) 완화적인 것 아니냐'라는 우려가 나온다”라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직은 금융 상황이 긴축적”이라고 말했다.
카드 대란 때도 이랬다. 괜찮다고 했다. 가계 부채에 관한 지표들도 안정적이었다. 소득으로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자 상환비율은 2000년에는 10.5%, 2002년에는 9%로 떨어졌다. 당시 미국의 14.1% 보다 낮았다.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 부채는 2000년 기준 90% 수준으로 미국의 114%, 일본 121%에 비해 적었다.
심지어 신용카드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01년까지만 해도 신용카드 연체율은 최저 수준이라 해도 무방한 2% 전후였다. 사실 단순 지표만 봐서는 당시 카드 부실 사태가 터지면 안 됐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다르다. 지난 4월 신용대출이 4000억원가량 증가한 데 이어 이달에도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추산된다.
신용카드 대출이 타 금융권에서 최대한 대출을 쓴 후 사용하는 마지막 수단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대출금을 갚기 어려운 지경에 처한 차주가 늘었다는 의미다.
은행권에서도 경기에 따라 연체율이 더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가계 신용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은행 대출은 오히려 증가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지난 28일 5대 시중은행의 이달 가계대출 잔액(21일 기준)은 전월 대비 2조4272억원 증가한 700조4302억원이었다. 한달 새 4조원이 넘게 증가한 상황에서 이달에도 큰 폭의 증가세가 관측됐다.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는 연일 소비를 조장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온다. 열심히 일하지도 않았는데 떠날 것을 부추긴다.
‘워라밸’과 ‘욜로(You Only Live Once)’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저축이 덕이던 시대는 가고 소비가 미덕이 됐다. 현금이 없어도 소비가 가능하니 일단 쓰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하다.
덕분에 가계 부채는 늘어가고 경기침체로 기업 경영은 갈수록 어렵다. 코로나19 이후 각종 선심 정책으로 정부 곳간도 비어간다. 2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한다. 더 이상 당겨쓸 게 없으면 어떻게 할지 묻고 싶다. 정부의 안일한 시각이 걱정이다.
유창선 금융시장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