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토마토 김성훈 기자] 화재나 폭발 위험이 없는 ‘바나듐이온’ 배터리가 시장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롯데케미칼(011170)이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 소재 기업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롯데케미칼이 세계 최초로 바나듐이온 배터리를 개발한 국내 기업의 지분을 미리 확보해두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흥행이 롯데케미칼 석유화학 부문의 실적 변동성을 줄이는 데에 조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성준 한국조선해양 미래기술연구원장(왼쪽)과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바나듐이온 배터리(VIB) 기반 차세대 선박용 ESS 솔루션 공동개발' 업무협약 체결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한국조선해양
한국조선해양(009540)은 지난달 27일, 배터리 연구·제조기업 스탠다드에너지와 ‘바나듐이온 배터리 기반의 차세대 선박용 ESS 솔루션 개발’에 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진이 지난 2013년 설립한 회사로, 세계 최초로 바나듐이온 배터리(Vanadium Ion Battery, VIB)를 개발했다.
바나듐이온 배터리는 물이 주성분인 전해액을 사용해 배터리가 파손되더라도 화재와 폭발의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기차와 전기 추진선 등에 많이 쓰이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경우 전해액이 휘발성이 강한 성분으로 구성돼 외부의 충격과 파손으로 화재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출력이 2배 가까이 높고, 수명도 4배 이상 길다는 것도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장점이다. 바다늄이온 배터리는 반복적인 충전·방전에도 배터리 성능 저하가 거의 없어 안정성과 내구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조선해양은 스탠다드에너지와의 협약을 통해 △바나듐이온 배터리 기반의 선박용 고안정성 ESS 솔루션 개발과 상용화 △소형 선박 해상 실증 △선급 인증·선급 규정 완화 △전기추진선·전력운송선 등 차세대 선박 개발 협력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번 협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스탠다드에너지가 한국조선해양의 선박에 탑재될 바나듐이온 배터리를 직접 제작, 공급한다는 것이다.
조선업계에서는 바나듐이온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하이브리드 추진선이 해상 실증에서 성과를 보일 경우,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본다. 글로벌 조사 기관 IDTechEX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하이브리드 추진선 시장은 2029년까지 연평균 26% 성장해 시장 규모가 약 14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스탠다드에너지는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최초 개발사로서 시장 확대의 수혜를 톡톡히 볼 전망이다.
황진구 롯데케미칼 기초소재사업 대표와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롯데케미칼
스탠다드에너지 외에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흥행으로 미소 짓는 곳이 또 있다. 롯데케미칼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1월 약 650억원을 투자해 스탠다드에너지의 지분 15%가량을 확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해당 투자에서 지분 확보만큼이나 눈에 띄는 점은 롯데케미칼이 스탠다드에너지에 바나듐이온 배터리용 전해액을 공급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수요가 늘수록, 스탠다드에너지의 기업가치 상승으로 인한 투자 효과뿐만 아니라 전해액 판매를 통한 수익도 커지는 일거양득의 계약이다. 롯데케미칼은 스탠다드에너지와의 협업을 그룹 차원으로까지 확대해, 전기차 충전소·도심항공교통(UAM) 사업에 진출하는 것도 염두하고 있다.
지난 2011년부터 바나듐·아연흐름전지 등 ESS용 2차전지 소재를 연구, 2019년부터는 바나듐이온 배터리용 전해액 사업을 준비해온 롯데케미칼은 현재 배터리 소재 기업으로의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오는 2023년 하반기에 2100억원을 투입한 배터리 전해액 유기용매 생산시설이 완공되면, 롯데케미칼은 배터리 4대 핵심 소재인 △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전해액 중 음극재를 뺀 3대 소재를 생산하는 기업이 된다. 특히 분리막 소재 사업은 2025년 10만t, 2000억원 규모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스탠다드에너지 외에 배터리 개발 기업에 대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롯데그룹의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 롯데벤처스는 미국 완성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 KTB네트워크와 함께 미국 배터리 스타트업 소일렉트(Soelect)의 시리즈A 투자에 참여했다. 시리즈A란 제품 출시·마케팅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한 초기 단계 투자다.
롯데벤처스는 해당 투자금을 롯데케미칼이노베이션펀드 2호에서 조달했는데, 롯데케미칼은 이 펀드의 총 출자금 130억원 중 무려 76%인 99억원을 출자했다. 사실상 롯데케미칼의 전략적 투자를 위한 펀드다. 나머지 24%의 출자금 중 대부분도 롯데케미칼의 자회사인
롯데정밀화학(004000)의 출자로 조성됐다. 롯데케미칼은 전기차 고속 충전용 리튬메탈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는 소일렉트와의 협업까지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업계에서는 바나듐이온 배터리용 전해액 등 롯데케미칼의 배터리 부문 수익이 석유화학 부문의 실적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지난해 4분기 롯데케미칼은 오미크론 확산세와 유가 급등 등으로 인해 영업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6.3% 감소했다. 이안나 이베스트증권 연구원은 “헝다 디폴트 위기·전력난·고강도 방역 정책 등으로 인한 중국 경제 위축과 중국 중심의 대규모 에틸렌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 등으로 롯데케미칼의 올해 실적도 지난해보다 감익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요가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배터리 소재 부문을 키워, 글로벌 경기·계절·원자재 가격 등 다양한 외부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석유화학 부문의 실적을 보완하고 나아가 성장을 도모한다는 것이 롯데케미칼의 전략으로 분석된다.
김성훈 기자 voic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