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롯데그룹 2인자인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이 물러났다. 롯데그룹이 연말 정기 인사가 아닌 임시 이사회를 열고 고위급 인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창립 이래 처음이다. 재계는 이번 인사를 두고 사상 초유의 실적 부진을 맞게 된 롯데그룹의 문책성 인사로 풀이하고 있다. 실제 내부에서는 위기감이 감도는 분위기다. 외부에서 보는 롯데에 대한 시선도 예전만 못하다. 이에 <IB토마토>는 롯데의 역사와 주요 계열사의 실적을 집중 분석하고, '혁신'에 대한 IB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아 미래를 전망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IB토마토 박기범 기자] "신동빈 회장이 롯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제야 알았다"
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롯데'는 여전히 국내 일류 브랜드지만, 예전만 못하다. 30년 이상 IB에서 인수·합병(M&A)을 한 관계자는 "90년대나 2000년대는 롯데백화점 쇼핑백에 선물을 담아서 주면 엄청난 성의 표시였다"면서 "핸드백 하나를 사더라도 롯데백화점 보증서를 받기 위해 롯데백화점에서 사던 시대가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지금 롯데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예전의 이야기다"라고 덧붙였다.
출처/롯데 그룹 사보
과거 롯데그룹은 회사 규모, 신뢰도, 실적 등 다방면에서 1등이었다. 1960년대 한·일 수교가 풀린 이후 롯데제과를 설립해 한국에 본격 진출한 이후
롯데칠성(005300), 롯데삼강(현
롯데푸드(002270)),
롯데쇼핑(023530), 롯데호텔 등을 설립해 연이어 성공하며 승승장구했다. 이어 70년대 말 호남정유화학을 인수, 화학 산업에 진출하며
롯데케미칼(011170)을 롯데그룹의 '캐시카우'로까지 키웠다. 당시 고 신격호 명예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세계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크게 신경 썼다.
지금도 국내 1등인 롯데그룹의 계열사는 많다. 하지만 백화점 수, 자동차 등록대수, 에틸렌 생산량, 빙과시장 점유율 등 규모에 집중돼 있을 뿐 실적으로는 큰 부진을 겪고 있다. <IB토마토>가 2017년 이후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의 매출액 변화율, 영업이익과 같은 주요 실적을 집계한 결과 지난 3년간 롯데 주요 계열사들은 대부분 한국 평균 기업들의 실적을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이 같은 문제가 고착화되는 모습이 숫자를 통해서 나타난다. <관련기사 : (위기의 롯데)①한계 왔나?…숫자로 본 '신동빈호', 서서히 가라앉는 중
http://www.ibtomato.com/View.aspx?no=3804&type=1>
롯데그룹의 핵심 사업들은 코로나19에 실적 악화까지 겹치며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7년 이후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중국 내 사업은 철수했고,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여파도 혹독히 겪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3월 대산공장 화재로 가동이 멈추며 대규모 손실과 비용이 발생했고, 롯데호텔은 장기신용등급이 잇달아 하향 조정됐다. 핵심인 유통사업에선 통합 온라인몰 '롯데ON'을 야심 차게 출범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재계 순위 4위인
LG(003550)그룹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차이를 보인다. 공정위 공시 상 지난해 말 기준 롯데그룹과 LG그룹의 총자산은 122조원과 137조원으로 LG그룹이 15조원가량 많다. 매출액 기준으로 비교하면 차이는 상당하다. 롯데그룹의 지난해 매출액은 62.5조원으로 LG그룹의 122조원 절반 수준이다. 자산은 대동소이하지만 매출액은 LG그룹이 2배가량 많다.
롯데 주요 계열사들과 한국 기업 평균 실적 변화. 출처/금감원 전자 공시, 한국은행
비효율성이 생기고 있지만, 롯데그룹 차원에서는 변화를 주지 못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불안정했던 롯데그룹의 경영권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2015~2017년 사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4번에 걸쳐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을 했다. 소위 '형제의 난'이다. 이후 안정을 찾나 싶었지만 2018년에는 국정 농단, 경영비리 사건 등으로 법정 구속되면서 '옥중 경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석방 이후 신동빈 회장은 롯데케미칼을 중심으로 '광폭 행보'를 했다. 롯데 그룹의 키맨으로 불리는 임병연 전 경영혁신실 가치경영팀장을 2019년 초 대표이사로 앉혔다. 신 회장 역시 같은 해 5월 셰일가스 기반 에틸렌 생산 설비 준공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면담을 하는 등 활발하게 경영활동을 했다. 또한 연말에 가까워지자 비상경영 선언, 쇄신 인사 등 롯데그룹의 변화를 주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올해는 현장의 문제점을 꼼꼼하게 살피는 모습이다. 지난 5월과 6월 신 회장은 롯데푸드와 롯데케미칼 공장, 롯데칠성음료 스마트팩토리,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 등을 방문했다. 롯데호텔 '시그니엘 부산'개관식에도 참석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최근에 부각된 면이 있지만 신동빈 회장의 현장 방문은 낯선 일이 아니다"면서 "꾸준히 현장을 방문하며 상황을 점검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신 회장은 디지털로의 전환(DT:Digital Transfomation)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13일에는 경영지원실을 경영혁신실로 바꾸며 '혁신'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대다수 IB전문가들은 롯데그룹의 '혁신'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롯데ON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E커머스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지난 4월 롯데그룹은 7개사를 통합해 롯데ON을 론칭했다. 하지만 롯데ON은 서버 트래픽 과부하 등을 해결하지 못하며 지난 4월과 6월 접속 지연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IB업계 관계자는 "롯데ON이 대표적인 케이스"라면서 "Url만 붙여서 만든 애플리케이션으로 현재 E커머스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롯데그룹이 만든 벤처캐피탈(VC)인 롯데엑셀러레이터 역시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총 운용자산(AUM) 970억원, 경영참여 방식이 아닌 5% 수준의 지분 투자 방식 등을 고려할 때 규모로나 투자 방식으로나 그룹 차원 '혁신'의 상징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롯데그룹 임원들의 위기감은 상당하다고 전해진다. 다른 IB업계 관계자는 "많은 롯데 임원들이 본인들이 롯데그룹을 오래 다니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면서 "차·부장 때는 1등을 해왔는데 지금은 그 성공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계열사마다 다시 1등 기업으로 되돌아갈 솔루션을 제출하라고 신 회장이 주문한다면 거기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계열사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큰 틀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30년 이상 M&A 자문업을 했던 IB관계자는 "가장 필요한 것은 기업 문화의 변화"라면서 "하지만 가장 변화가 어려운 것이 기업 문화"라고 말했다. 이어 "기존 롯데 문화에 섞이지 않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 롯데 그룹의 현재 자산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수준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E커머스 시장이 커져, 마트를 줄이는 것이 대안은 고루한 전략"이라고 꼬집었다.
박기범 기자 partner@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