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토마토 홍준표 기자] 정부가 모태펀드 예산을 축소하면서 관련 업계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민간 중심 벤처생태계 전환을 내세우고 있지만,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민간 출자 기반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자금이 축소되면 민간 시장 유동성 약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중소벤처기업부)
10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벤처투자 규모는 총 11.9조원이다. 이 중 모태펀드 출자액은 1조3516억원으로 전년 대비 37.8% 증가한 반면, 민간 부문 출자는 25.1% 감소했다.
그러나 올해 3분기까지 벤처투자 규모는 9.8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 증가한 가운데 민간 부문 출자가 28.8% 증가하면서 지난해 마중물 역할을 했던 모태펀드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나온다.
모태펀드는 2005년 출범 이후 국내 벤처투자 시장의 핵심 상위펀드(Fund of Funds)로 자리 잡았다. 매년 결성되는 다수의 벤처펀드에서 모태펀드가 실질적 앵커 기관출자자(LP) 역할을 수행해왔고, 시장 침체기에는 투자 수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지난해 글로벌 벤처펀드 결성 규모는 2020년 약 2300억달러에서 약 1090억달러로 절반 넘게 감소하는 등 침체기에 빠졌지만, 한국은 같은 기간 모태펀드 규모를 1.3조원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벤처캐피탈(VC) 생태계가 극심한 침체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평가다.
VC 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예산 축소에 따라 민간이 리스크를 떠안으면서 출자 규모를 늘릴 만큼 시장 여건이 양호하지 않다”라며 “오히려 모태펀드 예산 축소는 민간 위축을 부추기는 구조”라고 말했다.
민간 LP 기반 미성숙…모태펀드 축소 '시기상조'
업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점은 민간 LP의 다양성과 규모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미국·유럽처럼 연기금과 기관투자가가 벤처투자 시장의 핵심 공급자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가 빠질 경우 공백 자체가 메워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특히 고금리·주식·부동산 시장 불확실성 등으로 기업과 기관의 출자 여력이 떨어지면서 민간 LP의 출자 의향은 지속 감소해 왔다.
제도적으로도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지주회사가 운영하는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의 VC 투자에는 외부자금 비율 40% 이하, 부채 비율 200% 이하, 해외 투자 비중 20% 이하 등의 규제를 비롯해 은행계 금융기관의 벤처펀드 출자엔 400% 위험가중자산(RWA)을 적용하는 등 민간 출자 확대 관련 규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특히 딥테크·AI 등 전략기술 스타트업의 경우, 대규모·장기 투자가 필수적이어서 모태펀드와 같이 정책 기반 자금의 ‘인내자본’ 기능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분야일수록 모태펀드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2일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10년 이상의 투자 회수 기간이 필요한 AI·딥테크 분야의 특성상 모태펀드 영구화를 중기부와 논의한 끝에 10년 단위로 기간을 연장할 수 있게 법 개정이 이뤄졌다.
모태펀드는 출범 당시 ‘민간 시장이 성장하면 정부 역할은 단계적으로 축소된다’는 전제 아래 존속기간을 30년(2035년까지)으로 설정한 바 있다. 그러나 모태펀드 축소는 곧바로 초기 투자 위축, 딥테크 장기투자 공백, 전략산업 투자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불거졌다. 이재명 정부 출범 당시 이를 국정과제로 삼았고, 관련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모태펀드의 사실상 영구화를 가능케 했다.
중소형·신생 VC 직격탄…민간출자 감소 '우려'
관련 업계에선 모태펀드 예산 축소에 당장 중소형 VC와 신생 VC부터 압박감을 느낄 것이란 우려다. 대형 VC는 자체 자본과 출자자 풀을 확보하고 있지만, 신생 VC는 초기 트랙레코드가 부족한 상황에서 민간 출자를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태펀드가 축소되면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려워지는 구조다.
나아가 최근 중기부가 모태펀드 선정 평가에서 펀드 결성 가능성 비중을 크게 높이면서 민간 LP 네트워크가 취약한 신생 VC는 구조적으로 불리한 환경이 형성된 상황이다. 실제로 올해 초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사업에는 196개 조합이 지원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 지난해(190개)보다 더 늘어났다. 민간 출자와 관련해 규제 완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환경 속에서 신생 VC들은 모태펀드에 기댈 수밖에 상황이다.
벤처캐피탈협회는 최근 입장문을 통해 “AI·딥테크 등 전략산업은 대규모·장기 투자의 연속이기 때문에 민간 자본만으로는 시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며 ▲모태펀드 출자의 4배 레버리지 효과, ▲앵커 LP 참여 시 연기금·금융권 출자 활성화, ▲창업초기·지역·재창업 등 민간 자금 공급이 부족한 분야 지원 등을 근거로 들며 예산 축소가 민간 출자 감소를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VC 심사역은 <IB토마토>에 “최근 주요 연기금이나 공제회 등에서 출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이외 민간 LP들은 아직까지 관련 규제나 리스크를 피하려고 자금을 묶어두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마중물이 축소되면 민간이 늘지 않고 전체 시장 파이가 줄어들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