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토마토 이하영 기자] 올봄 코로나19 거리 두기가 해제됐지만 재계는 함께 모여 웃기 힘들었다. 올해 재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등 대내외적인 이슈에 시달렸다. 그러나 재계는 연달아 터지는 악재에 신음하면서도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해 투자 확대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수도 키이우 외곽에서 순찰을 하고 있다.(사진=AP연합뉴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불똥’
2022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전쟁이 시작됐다. 1년여간 지속된 전쟁은 전 세계적인 에너지난과 원자재난 등 공급망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에서 공급받는 액화천연가스(LNG)가 줄자 유럽이 에너지 수급난을 겪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연결됐다. 국제 LNG 가격이 수십배 폭등하며
한국전력(015760)공사의 전력조달비 상승 압박을 이끌었다.
러시아에 직접 진출한 우리 기업도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국내 기업 중 러시아에 법인을 둔 곳만 53개사로 파악됐다. 이 중
현대차(005380)그룹이 러시아 내 18곳에 법인을 두고 있어 가장 피해가 심했고,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으로 그 뒤를 이었다. 관련 공장들은 개점휴업 상태다.
특히 지난해 러시아 내 자동차 점유율 27%(현대차·
기아(000270) 합산)를 차지한 현대차그룹은 끝나지 않는 전쟁에 진퇴양난에 빠졌다. 재고분 판매, 유급휴가로 버텼으나 최근 러시아 법인 인원 감축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철수에만도 수천억원대 매몰 비용이 예상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5월22일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숙소인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면담 자리에서 영어 연설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IRA로 미국투자 붐 일어…자금조달도 문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올해 5월 방한을 전후로 국내 대기업에 미국 내 약 300조원 투자계획을 성공시켰다.
삼성전자(005930)가 향후 20년간 2000억 달러(약 250조원) 투자 약속을 받은 것을 비롯해,
SK(034730)그룹에 220억 달러(약 29조원), 현대차그룹에 105억 달러(약 13조원) 등 투자를 받았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지난 8월 미국의 IRA 법안 통과다. 기후위기 관련 인프라 확대 등에 향후 10년 내 4850억달러(약 684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때 전기차 보조금과 태양광 지원금 대상을 북미나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의 상품으로 한정했다. 국내 산업계 입장에서보면 보조금을 미끼로 미국 투자를 강요하는 셈이다. 덕분에 국내기업의 미국 투자는 5월 바이든 대통령 방한 이후 지속 상승하는 추세다.
재계는 투자 진행이 단기간 긴급하게 이뤄진 데다 부동산PF발 위기까지 겹쳐지며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직격탄을 맞은 것이 2차전지 동박회사
일진머티리얼즈(020150)를 2조7000억원에 인수에 나선
롯데케미칼(011170)과
SK이노베이션(096770)(SK이노)의 배터리 부문 자회사 SK온 등이다. 롯데케미칼은 1조원 상당 유상증자와 자본시장에서 대출을 받을 예정이다. 지난해 7월 SK이노에서 물적분할한 SK온은 전기차용 배터리 강점을 살려 대대적인 투자유치에 나섰으나 악화된 조달 환경 영향으로 만족할 만큼의 투자금 유치에는 실패했다. 이에 모기업인 SK이노의 2조원 유상증자 지원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IRA로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이 미국 내 전기차 점유율 상승세를 타던 현대차그룹이다. 완성차의 경우 북미 조립차가 아니면 보조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으로 예정된 공장 완공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고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의회 설득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자 최근 멕시코로 공장 증설 계획을 밝히는 등 강수를 두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국내 기업 총수들과 지난달 1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왼쪽부터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사진=사우디아라비아 매체 SPA 홈페이지)
네옴시티, 그룹 총수영업 활발
지난달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내한했다. 재계는 사우디 실권자인 빈 살만 왕세자 내한에 맞춰 총사업비 5000억 달러(약 670조원)의 네옴시티 프로젝트 수주에 나섰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달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솔루션(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HD현대(267250)(현대중공업그룹) 사장, 이재현
CJ(001040)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000150)그룹 회장, 이해욱
DL(000210)(옛 대림)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 8명과 만나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에서는 에너지·건설·스마트시티 등 각 그룹의 핵심 미래 사업을 토대로 사업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산업통상자원부와 사우디 투자부는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사우디 투자 포럼’을 개최하고 한국의 주요 기업과 사우디 정부·기관·기업이 총 300억 달러(약 40조원)에 이르는 26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물산이 MOU를 2건 성사시켰다. 한국전력 등 5개사와 함께 사우디 국부펀드(PIF)와 65억 달러(약 8조5000억원) 규모의 그린 수소·암모니아 공장 건설 프로젝트 MOU와 네옴시티 임직원 숙소 1만 가구를 짓는 모듈러 주택 기술개발 관련 MOU 체결이다. 이재용 회장이 빈 살만 왕세자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만큼 삼성그룹은 추가 수주가 기대된다는 평가다.
11월1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17회 외국인투자기업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정보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내년이 더 어렵다"…긴축 경영 속도 내는 기업들
내년 경기 한파 우려에 최고 실적에도 미리 긴축경영을 준비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올해 역대급 실적을 낸
HMM(011200)은 3분기말 기준 현금성자산이 10조원에 이르지만 근속 10년 이상 육상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모집했다. 경기와 밀접히 연결된 해운업계의 내년 침체 예상에 따른 선제 조치로 분석된다.
롯데면세점은 창사 이후 처음, 롯데하이마트는 20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 중이다. 롯데하이마트의 경우 매장수를 줄이며 추가 감원조치도 예상된다.
LG전자(066570) 베스트샵을 운영하는 하이프라자도 근속 연차에 따라 기본급 4∼35개월치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2분기째 적자를 기록 중인
LG디스플레이(034220)는 사업구조 재편에 따른 인력 효율화와 생산직 직원 대상 3∼7개월씩 한시적 자율 휴직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은행과 증권가는 대대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하이투자증권과 다올투자증권을 시작으로 우리·NH농협·수협은행 등도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NH농협은행의 경우 만 40세(1982년생) 직원까지 대상에 포함 시켰다. 올해 5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만 2400여명 정도의 희망퇴직자가 발생할 전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내년에는 대기업에서 공채를 생각하는 곳이 없는 것으로 안다”라며 “필요한 소수의 인원만 수시모집으로 뽑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크루트가 지난달 직장인 12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2.2%는 희망퇴직과 권고사직 등 감원 목적의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 조만간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도 32.7%에 달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행동주의 펀드로 지배구조 선진화를 위한 주주행동을 주도하고 있다.(사진=트러스톤자산운용)
주주행동주의 시대 개막
지난달 서울지방조세청 조사4국에서
카카오(035720)그룹의 비정기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계열사만 187개로 문어발식 확장을 하며 세금 회피 여부와 계열사 부당지원 등을 검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달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지분이 100%인 개인 투자회사 케이큐브홀딩스도 공정거래법상 금산분리 원칙 훼손으로 고발했다.
카카오그룹은 2009년부터 실적 좋은 사업부를 분리해 기업공개(IPO)를 하는 ‘쪼개기 상장’과 ‘임원 스톡옵션’ 등으로 소액주주에 미운털이 박히며 정부의 표적이 됐다. 카카오그룹은
카카오게임즈(293490)에서 분사한 라이온하트스튜디오를 비롯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카카오모빌리티의 상장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진행 중이다.
SM엔터테인먼트는 최근 주주행동에 철퇴를 맞아 지배구조 개편이 진행 중이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얼라인파트너스)은 창업주인 이수만 SM 총괄프로듀서의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에 매년 200억원 가량 지급하는 기획인세의 부당함을 공론화해 해지를 이끌어 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SM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지속해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이사회 과반을 사외이사로 구성해 객관성을 담보하는 한편 IR강화와 자본배치정책 및 중장기 주주환원정책 발표 등의 제안도 한 상태다.
태광그룹도 주주행동주의로 변신한 기업 중 하나다. 태광산업은 직접적인 지분 관계가 없는 이호진 전 회장 소유 흥국생명보험(흥국생명)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태광산업 지분 5.8%를 보유한 행동주의 펀드 트러스톤자산운용(트러스톤)이 내용증명을 보내 이를 강력히 비판하며 흥국생명 유상증자 포기와 적극적인 투자라는 약속을 이끌어냈다. 태광그룹은 최근 10년간 총 12조원 규모의 투자와 전 계열사에 걸쳐 약 7000명의 신규 채용을 약속했다.
이하영 기자 greenbooks7@etomato.com